수필
<검정고무신 추억>
지금도 생각난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정말 없이 살던 시절엔 모두가 힘들고 배고팠다.
70년대 초에 농촌은 특히 더 그랬다. 우리는 베이비부머 세대 戰後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前에 정치적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약자들의 이익이나 권리를 대변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다. 경제는 말 그대로 있는 자를 위한 시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지금이야 서천이 청정지역이라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지만 내가 초등(국민)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살아가기가 참 힘들었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친구 중에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난한 아이일수록 보리밥, 감자나 고구마를 많이 먹었다.
이때만 해도 초등학교는 육성회비가 분기 별로 350원 정도 냈던 기억이 난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였다. 350원이 없어서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막냇동생 둘을 (유아) 제외하고는 다섯이 학교를 다녔으니까 사실 육성회비 마련하는 것도 부모님에게는 허리가 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검정고무신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7남매(3남 4녀)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우리 집에서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밖에 없었다. 부모님에게 흰 고무신은 외출용 신발이었다. 아버지는 나들이나 동네잔치 집 가실 때는 흰 고무신을 신고 가셨다. 아버지는 흰 고무신에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으셨다. 사뿐사뿐 걸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 너무 부러웠다. 흰 고무신을 신으면 발걸음이 정말 가벼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너무 아껴서 신는 신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바로 흰 고무신을 깨끗하게 씻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으셨다. 비누도 아까워 지푸라기로 만든 수세미로 몇 번 쓱쓱 문지르면 금세 신발은 하얗게 되었다. 멀리에서 보더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얀 고무신은 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검은 고무신을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줄곧 신었다. 우리 반에는 운동화를 신은 친구는 몇 안됐다. 부잣집 친구만 멋진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운동화 신은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운동화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서야 운동화를 신어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초등학교 때에 운동화 신어 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은 내 기억 속에서 계속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새로운 검정 고무신만 신어도 기분이 참 좋았었는데...
검정 고무신에 대한 추억은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 신발이 물속에 잠겨도 방수가 잘 되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바로 마르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에 몇 번 만 담갔다가 꺼내면 검정 고무신은 까마귀처럼 검은빛을 냈다.
참 간편한 신발이었다.
겨울에 아무리 눈이 와도 방수가 완벽했다. 조금 발이 시럽 기는 해도 말이다. 특히, 진흙 길을 갈 때는 검정 고무신이 참 좋았다. 흙이 신발에 묻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에 오래 신다 보면 발에 땀 이차 검은 물이 발등 위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고무신은 우리들의 좋은 장난감이었다.
여름에는 냇가 모래밭에서 부드러운 새 모래로 소꿉장난 "두꺼바 두꺼바 헌 집 줄게 새집다오"을 많이 했다. 이때 검정 고무신은 자동차도 되고 배도 때론 흙을 나르는 덤프트럭도 되었다. 고무신 멀리 던지기 시합은 참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도 고무신은 일 년은 거뜬히 신을 수 있었다. 고무신 바닥에 구멍이 나지 않거나 옆구리가 찢어지고 바닥이 달아서 구멍이 나야 고무신의 생명이 끝이 난다. 검정 고무신은 물놀이할 때 참 좋다. 신발을 신고 물속에 들어가면 신발이 여간해서는 벗겨지지 않는다.
우리 동네 북편에는 千房山 골짜기인 절굴, 천방 굴 앞 下馬 다리를 경유하며 작은 내, 큰 내, 도마천, 길산천이 금강으로 향하여 서해바다로 흐른다. 주요 물고기 잡기는 하마 다리 밑 시냇가에서 민물고기들을 손으로 훔쳐 잡기도 하고 어레미를 활용도 하였다. 숨기 잘하는 모래무지와 가시가 몹시 사나운 동자개(빠가사리), 거품 머금은 참게는 풀잎으로 집게를 동여매고 물고기 이동 수단이 바로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이 주는 가난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검정 고무신이 만들어준 많은 추억거리들이
나에게 더 와 닿는 것은 아마도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이다.
그 어렵고 부족하던 시절에 한 켤레의 흰 고무신에 만족하시면서 7남매를 키워내신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검정 고무신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검정 고무신을 보면 나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고 흰 고무신을 보면 아버지의 즐거운 나들이가 눈에 선하다.